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민간의 조사 === 첫 번째 학살은 독재정권 시기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의 학살이라 많은 국민을 구덩이 파는 데 동원했다 보니 구덩이 파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들과 군인들이 학살 현장을 증언하여 조사 시작 후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사격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지요. … 사수가 물러나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단총으로 다시 확인사살을 하고... 죽었는지 안죽었는지 지휘자가 또 다시 확인을 합니다. … 그 다음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 우루루 몰려와 시체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어요. 그 후 기관단총 사수가 다시 두 번을 왔다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2차 확인사살을 합니다. >---- >92년 2월 월간 「말」지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기사[[http://omn.kr/1nv1|#]] 구덩이를 파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익명)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https://naver.me/FM6swqdY|#]] >"말도 마. 파낸 흙을 구덩이 앞에 쌓아 놨었는데 가서 보니 흙이 전부 질컥질컥해. 장마철에 진흙길 걷는 것 마냥.. 비도 안 왔는데 왜 그런 줄 알아? 마른 흙이 피로 반죽이 돼서 그런 겨. 피 곤죽이 된 흙이 여기 무릎 아래까지 빠지더라고..아이구…." > >"가죽 장화를 신은 경찰(또는 군인)로 보이는 높은 놈이 구덩이에 들어가 시체더미를 발로 힘을 줘 꽉꽉 누르더라고.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소리를 내거나 꿈틀거리면 다시 시체 더미를 헤집고 권총을 빵빵빵 쐈어. 말도 마. 새우젓 담가 놓은 것하고 똑같았어."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구덩이를 파는 데 동원되었던 이규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중에 확인 결과, 학살현장은 폭이 1.8m, 깊이가 2m, 전체 길이가 200∼250m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 당시 학살현장에는 독경하는 스님과 미군도 있었다. 열흘쯤 재소자들을 옮기는 트럭을 목격했다. 지금도 이 밭을 조금만 파면 이런 인골이 무더기로 나올 것이다. 한때는 사람뼈가 밭 주변에 널려 있었다.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은 다음과 같다. >(골령골) 능선에는 경비헌병이 지키고 있었고 미군하고 사회 유지들도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그 앞에 와서 죄수들을 쏟아부었지요. (트럭에 실린) 죄수들이 도착하면 억지로 돼지 새끼 끌어내리듯 끌어내린 겁니다. 소방수들이 죄수들을 구덩이 앞에 엎어서 눕혀 놓고 물러나면 사수는 왼발로 (죄수) 발을 밟고 총구를 대각선으로 겨냥합니다. '사격 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참, 사람이 못할 일이었습니다.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골이 튀어나와 온몸에 튀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이 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기관단총으로 다시 두 번을 왔다 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확인사살을 합니다. 구덩이가 차면 소방대원들이 매장하게 되는데 주위는 온통 피 반 흙 반이에요. 아무리 흙을 덮어도 발이 툭툭 불거져 나와요. 밤 9시가 넘었는데 그래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더라고요. 다시 흙을 제치고 사수들이 소리가 안 날 때까지 M1 소총으로 마구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산내면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현장 근처가 온통 피바다였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들 중엔 20세 미만의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 >1992년 <월간 말>(2월 호)가 인터뷰(글쓴이 소설가 노가원)한 당시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증언[[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73107|#]] 학살현장을 목격한 또 다른 주민은 “당시 의용소방대 소속 젊은이들이 ‘악질분자들을 묻을 구덩이를 파야한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끌려가 부역을 했다”며 “그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학살로 인해 한동안 골령골에는 땅에서 핏물이 배어나오고, 근처 냇물은 붉게 변했으며 물에서는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2차선 도로를 만들 때 포크레인 기사가 무수히 바뀌었다고 한다. 하도 유골이 나와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지 못했다는 것. 또 전쟁 직후 보따리 장사라도 하기 위해 이 길을 다녀야 했던 주민들은 흙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http://omn.kr/1nv1|#]] 한편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7000여 명이 대전 골령골에서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기사는 "학살은 미국 고문관의 감시 하에 진행됐다"고 썼다. 최근 민간에서 진행된 조사로 미국이 학살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지고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73107|심규상, 미국이 '흉악한 조작'이라던 대전 골령골에서 쏟아져 나온 유해]] 위 기사를 쓴 심규상 기자는 90년대부터 학살을 조사한 유명한 활동가이다. 다음은 진실위 조사관들이 직접 한 말이다. >진실위는 왜 미국 희생사건에 인색했나. '대한민국'이 완전히 '빨갱이 나라'가 되는 걸 목숨 걸고 막아준 그 고마운 미군에 대해, 절대로 고의로거나 실수로라도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눴을 리 없는 그 미군에 대해 당신들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고, 여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조사관들이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 내외에서 '좌익 반미주의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607070|#]]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사기간이 만료돼도 40~50%밖에 해결 못한다, 자신도 9명의 상임위원 중에 한 명에 불과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유족회는 “보수정권으로 바뀌니 변명으로 일관하고 기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려 진실규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략) 부산·대구·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됐다고 유족회는 덧붙였다. >---- >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전원 사퇴하라"[[http://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93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